일본 나고야성 혼마루어전 안은 미술관을 방불케 할 만큼 장벽화가 가득했습니다. 복도를 따라 방 안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걸음을 옮겼어요. 황금으로 칠한 벽면에 호랑이와 표범, 소나무가 그려진 위엄 있는 방을 지나자 이제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풍속화가 나왔어요. 좀 더 정겨운 느낌. 그러다 어느 순간엔가 황금색 바탕이 거두어진 하얀 도화지 위에 먹의 농담으로 그린 수묵화 방에 당도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어요.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멈추는 것 같았달까요. 화려한 위엄, 수수한 일상, 고요한 수묵으로 이어지는 길. 혼마루어전의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치밀하게 기획된 좋은 전시를 다녀온 것 같았답니다.

Peter Falconer, Seaton Snook and the Building of a Parafictional Seaside Town 

20세기 이후의 동시대 현대음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지 Tempo의 이번 호는 작곡가와 연주자, 사운드 아티스트 등이 기고한 흥미로운 글들로 채워져 마치 특집호 같은 느낌을 줍니다. 작곡가의 판본과 연주의 다의적 관계, 기보와 즉흥 연주, 작품에서 작곡가의 위상에 관한 문제, 새로운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 개입되는 모든 시간에 관한 탐구, 연주와 공연 현장에서 기술과의 협업 등 다양한 주제들이 펼쳐지는데요, 제가 선택한 논문은 영국 더럼 주 해안에 위치한 마을 시튼 스누크Seaton Snook의 소리 및 음악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 결과를 담은 글입니다. 그렇지만 저자 팔코너는 스누크의 실제 소리와 음악에 대한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파라픽션parafiction적 접근을 시도하여 독자의 흥미를 불러 일으킵니다. 파라픽션의 개념이 조금 낯설 수도 있으실 텐데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허구적 서사를 통해 진실을 조작하는 장르적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쯤 되면, 학술 논문에 파라픽션적 접근이 왜 필요한가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겠습니다.

작곡가이자 연주자, 성우, 작가로 활동 중인 저자 팔코너 박사는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 역사 연구와 저널리즘을 결합하여 파라픽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중세 시대에 소금 생산으로 유명했으며, 한때 교회, 학교, 놀이공원, 석탄채굴소, 아연 정제소, 실내 시장 등이 있었던 번성한 공동체였던 시튼 스누크는 1968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저자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그곳에서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소리를 통해 재구성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는 시튼 스누크 지역 주민과 노동자의 목소리, 피아노와 하프시코드 음악, 노스움브리아 소형 파이프를 위한 음악, 브라스 밴드 음악, 크라우트 록, 사이키델릭 록, 마그네틱 테이프용 음악 등의 오디오 자료를 담은 온라인 아카이브를 창설합니다. 그리고 작곡가 게이너 리Gaynor Leigh의 작업을 새로이 구축하는가 하면, 지역의 바다소리를 연상시키는 반음계 오스티나토를 기반으로 방언과 억양으로 노래했던 밴드 ‘The Peoples Mass’의 활동을 조망합니다. 이 논문은 사라진 마을 시튼 스누크의 소리를 보존하고 재구성하여 궁극적으로는 영국 북동부의 경제적 문화적 소외에 대한 저자의 메시지가 파라픽션을 통해 어떻게 전달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사실에 기반한 허구를 통해 작가의 메시지가 사실보다 더 정확하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가짜 뉴스나 딥페이크와 구분되는 파라픽션의 장점이 부각됩니다. 과거의 팩트와 허구의 상상력, 현재의 실제가 만나는 흥미로운 파라픽션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논문을 읽어보세요.

(왼쪽) 아론 코플랜드(이석호 옮김),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포노, 2016) 

(오른쪽) Edward T. Cone, Musical Form and Musical Performance (W. W. Norton & Company, 1968)eutsche Welle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What to Listen for in Music. 미국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 1900-1990가 던진 질문입니다. 사실 코플랜드의 강연 제목인데, 1939년 책으로 출판되어 인기를 끈 바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본도 있으니 코플랜드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실제로 이 질문에 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무엇을 듣는다는 뜻일까요? 미국의 음악이론가 에드워드 T. 콘Edward T. Cone이라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형식을 듣는 것"이라고 답할 겁니다. 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면 여기 반드시 읽어야 할 두 편의 논문이 있습니다.

김선빈의 연구는 무엇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는 브루크너 다시 듣기에 도전합니다. 정확히는 브루크너 교향곡의 형식 다시 듣기. 더 정확히 말하면 브루크너 형식 분석을 통해 그의 음악을 재평가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입니다. 브루크너 형식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연속적인 시간성을 밝혀 그동안 단절된 블록의 결합으로 이해되었던 브루크너 소나타 형식의 역동성을 주장합니다. 브루크너 교향곡이 형식적으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고 느꼈던 독자라면 김선빈의 논문이 그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것입니다.

반면 테일러의 연구는 헤포코스키와 달시Hepokoski & Darcy의 소나타 이론Sonata Theory을 19세기 소나타 형식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탐구합니다. 흥미롭게도 분석 대상은 멘델스존. 이른바 '전통주의자'로 알려진 멘델스존이지만 그의 작품 가운데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현된 형식은 거의 없습니다. 이번 논문의 분석 대상인 현악사중주 D장조, 1악장도 마찬가지. D장조 작품 1악장에서 F♯단조는 대체 뭐 하고 있는 것인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별것 아닌 조성인지 아니면 형식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인지, 제시부에서 가장 중요한 종지라 할 수 있는 필수 제시부 종결essential expositional closure, EEC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EEC가 없다면 이 제시부는 어떻게 성립하는지 등, 그야말로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는 소나타 형식입니다. 물론 18세기 말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 혹은 이 시대 소나타 형식에 기초한 소나타 이론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 발표된 지 어느덧 20년이 되어 가는 소나타 이론이 19세기 작품과 만나 어떻게 수정, 확장될지 기대됩니다.

마침 두 편의 논문 모두 오픈 액세스Open Access로 출판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명한 국제 학술지에서 한국 음악학자의 이름과 연구를 접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