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온 추위가 뼛속까지 아립니다. 여러 겹 옷을 껴입어 비대해진 몸을 한껏 웅크리고 칼바람을 가릅니다. 지난 주만 해도 푸근하던 기운을 생각하면 웬 강추윈가 싶지만 달력을 보니 벌써 올해 끝자락이네요. 한겨울입니다. 이 겨울 한가운데를 뚝 잘라 올해를 보내고 내년을 맞겠지요. 아쉬움, 섭섭함, 애틋함, 성취감, 충만함, 기대감, 초조함 같은 기이한 감정들이 순서 없이 밀려옵니다. 그러고 보면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반기는 강렬한 이벤트는 이 추위를 견디게 하는 속힘인가 봅니다.

Clare Beesley

우리에게는 자메이카는 ‘레게의 발상지’로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 논문은 우리를 18세기 후반 자메이카에서 싹트고 있었던 클래식 음악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저자는 자메이카 최초의 작곡가로 알려진 사무엘 펠스테드(Samuel Felsted, 1743–1802)의 삶과 그의 두 번째 오라토리오 《헌정》(The Dedication)을 다룹니다. 펠스테드는 영국계 미국인을 부모로 두고 자메이카에서 탄생하고 활동한 ‘크리올 백인’이었습니다(이와 달리 오늘날 ‘크리올’은 유럽인들과 아메리카 식민지 지역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을 지칭하죠). 자메이카는 1655년부터 1962년까지 무려 300년 이상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유럽에 설탕을 제공하는 농업을 유지하기 위해, 이곳에는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끌려왔고, 펠스테드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은 그 노예무역의 절정기였습니다. 펠스테드 역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저자는 펠스테드의 삶과 음악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노예제도의 흔적들에 주목합니다. ‘자메이카 최초의 작곡가’라는 점은 펠스테드에 대한 평가에 자메이카 민족주의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음을 의미하죠. 그를 재평가하기 위해, 저자는 자메이카 민족주의와도, 그리고 그의 음악을 단순히 서양예술음악 정전의 주변부에 두고 싶어 하는 음악학의 경향성과도 거리를 둡니다. 펠스테드의 삶과 음악을 18세기 후반 자메이카 사회와 문화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저자는 그를 한 시대의 역사적 인물로 재평가하는 작업에 도전합니다.

Chriscinda Henry

1973년 발행을 시작한 학술지 Early Music이 어느덧 창간 5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2023년 2월 발행된 통권 51-1호는 학계 유명 인사들의 축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그 와중에 특집호도 꾸렸어요. 주제는 “16세기 이탈리아 시각 문화의 음악, 젠더, 에로티시즘.” 특집호 편집자의 서문을 제외하고 게재된 일곱 편의 논문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글이라 선택하기 쉽지 않군요. 그래서 이번 픽은 특집호 소개로 대신할까 합니다. 사실 ‘소개’라고 할 것도 없어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음악은 이성적 판단과 관능적 유혹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 성격의 예술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물론 음악에서 묘사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시각 예술에서도 여성을 고결하거나 도발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요. 하지만 악기를 든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과 삽화가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각 자료는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특집호에 실린 논문들은 이러한 자료를 재검토하여 여성 음악가를 특정 이미지와 일치시키려는 기존 해석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고 보니 2023년도 얼마 안 남았군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맥락화했는지 궁금하신 분들에게 이번 특집호가 좋은 연말 선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Leon Botstein

영화 〈타르〉(TAR)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최초 여성 지휘자로 명성의 정점에 선 가상인물 리디아 타르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타르 역을 성공적으로 소화해 내며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클래식 음악도 느닷없이 뜨거운 관심속으로 들어왔죠. 클래식 음악의 종말을 선포하고 그 어두운 미래를 점쳤던 목소리들이 무색할 정도로 뉴스 언론과 엔터테인먼트계는 클래식 음악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성공했고요. 또 놀라움을 선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음악계에서 이 영화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일부 음악가들, 특히 지휘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본의 아니게 영화의 암묵적 모델이 된 여성 지휘자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죠. 오랫동안 쌓아온 클래식 음악 전통과 유산이 간과되고 음악가의 삶과 예술이 가벼운 가십거리로 왜곡되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반면 몇몇 음악가들은 영화의 성공과 대중성이 클래식 음악에 해될 게 없다며 옹호의 입장을 드러냅니다. 오랫동안 남성이 지배해온 영역에 진입한 여성의 성공과 욕망, 삶과 예술에 대한 영화의 묘사가 타당한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영화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사운드트랙에 나오는 음악과 영화의 장면들이 대중에게 널리 퍼질수록 클래식 음악의 미래는 나아질 거라는 반응이었죠. 이 글의 저자는 영화에 대한 찬반 입장을 피력하기보다는 오히려 클래식 음악계에 당면한 현실에 주목합니다. 저자는 ‘음악가들이 그토록 붙잡고 헌신해 온 예술의 가치들이 현재의 변화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물음을 던지고요. 클래식 음악이 즉각적인 자극과 볼거리에 휩쓸리는 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단지 감성을 자극하거나 집중이 필요 없는 배경음악으로 남게 될지, 음악을 통해 꿈꾸고 사색하고 자기를 표현하던 과거의 유산이 새로운 음악으로 전달되며 미래 세대로 이어질 것인지 되묻습니다. 클래식 음악이 정말 부활한 것일까요? 그 유산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 영화 〈타르〉 메인 예고편

Weida Wang

“듣는 것이 인간을 만든다.” 논문의 첫 시작부터 흥미롭군요! 청취 및 소리에 대한 인식은 서구의 인문학에서 주체로서의 인간을 구체화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자는 인종이나 성별 등에 이미 새겨진 이데올로기를 고려하지 않는 현재의 청취 패러다임이 육체로의 유물론적 전환을 요구한다고 비판합니다. 결과적으로 인식 가능한 범주로서 “체화된 청취”라는 패러다임이 백인, 건강한 신체,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cisgender)로 대표되는 서구 자유주의 인체를 상정하게 한다고 보는 것이죠. 논문 저자는 인식 체계에 들어가기 전 육체로서 귀가 느끼는 감각인 청각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몸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소리에 대해 완전히 다른, 트렌스(trans)하게 생각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귀를 물리적 혹은 이론적 틀로 인식하기보다 구체적인 감각을 느끼는 살의 물질성을 가진 신체 기관으로 전환하는 것이 소리와 음악 연구에 풍부한 사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합니다. 긴긴 겨울밤을 지적 욕구를 충족하면서 보내고 싶으시다면, 저와 함께 이 논문을 읽어 볼까요?

씨샵레터 2024년

내년 1월부터 씨샵레터는 발행 일정을 조정할 계획입니다. 올해 5월부터 새로운 콘텐츠 VIEW를 만들면서 월 3회 발행을 지속해 왔는데요. 내년에 계획하고 있는 씨샵레터의 새 프로젝트를 고려해, 오는 1월부터는 PICK과 VIEW를 각각 하나씩, 월 2회 발행하게 됩니다. 씨샵레터는 2024년에도 음악학과 소리연구에 관한 발 빠르면서도 재미있는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계속해서 뭉근한 관심 보내주세요.

2024년 씨샵레터 발행 콘텐츠 및 일정

📌 PICK

1️⃣ 음악학과 소리연구 분야에서 최근 발행된 학술지의 논문 목록을 모아 보내드려요.

2️⃣ 해당 학술지에서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전문 연구진이 PICK한 논문을 소개해요.

3️⃣ 월 1회 발행

4️⃣ 매달 첫 번째 목요일 오전 8시

👀 VIEW

1️⃣ 씨샵레터 팀의 VIEW가 담긴 칼럼을 보내드려요.

2️⃣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음악 외 씨샵레터 팀이 주목하는 여러 이야기를 담습니다.

3️⃣ 월 1회 발행

4️⃣ 매달 세 번째 목요일 오전 8시